News & Suzy Lee's travel sketches, drawings, photographs and wri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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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뒤바젱의 글 [Kr]


이 자료는 여을환씨의 웹사이트에 실렸던 <멍청한 집오리 피튜니아>의 로저 뒤바젱 (Roger Dubagin)의 글 (김중철 초역)을 갈무리 해두었던 것이다. 혼자 읽기 아까운 글이라 이곳에 올려본다.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로저 뒤봐젱(1965. 11.)

나는 이 곳에서 ‘알맹이 한 시간’ 동안 어린이책에 관하여 이야기해 달라고 초대를 받았을 때, 약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초대의 사연은 매우 명확했습니다. “알맹이 있게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건 대단히 명예로운 것이었습니다. 휴식 없이 한 시간 동안 알맹이 있게 이야기한다는 일은 보통 사람에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기회입니다. 저는 당연히, 정식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즐겁고 재미있다’는 표현이 어린이책을 만드는 일에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도, 정식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책을 만든다는 일은 실제 화가가 유머와 즐거움의 감각을 갖추고 있는 편이 좋은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잊으면, 결국 아이들을 지루하게 하는 책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즐거움과 진지함을 섞어서 어린이책 삽화를 그린다는 즐거운 직업에 대해 개인이 얻는 기쁨과 문제들을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먼저, 내가 갖고 있는 의문을 한 가지 말하겠습니다. 어린이책의 이야기를 쓴다든가 삽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대부분 의도적으로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화가들은 자기 아이들과 함께 노는 한 가지 방법으로 그림으로 이야기다운 것을 말하던 중에 우연히 그 즐거움을 찾은 것입니다. 이러한 놀이를 하던 중에 생생한 이야기의 원형 같은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이 참가한 것입니다. 이 조그만 즐거운 작업을 하던 중에 화가는 자신 속에 그때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재능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여러 명의 아이들을 앞에 두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놀이의 즐거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 행위가 생생하고 유머가 있다면, 아이들의 진지한 눈길과 웃는 소리가 즐거운 보답이 됩니다. 이야기와 그림에 창의가 부족하여 아이들 얼굴에 지루한 듯한 표정이 나타날 때에도, 그것이 즐거움의 일부가 됩니다. 아이들이 지루한 듯한 표정을 지을 때, 또 한 번 웃게 만들면 더한층 상상력의 움직임을 높이게 됩니다.


어린이 그림책을 만드는 일은 바로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입니다. 화가, 작가가 혼자 일하느라 책상에 있을 때조차도 이 놀이는 계속됩니다. 옆에서 보기에 고독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화가는 실제로 고독하지 않습니다. 어느 분야의 예술가도 그런 것처럼 화가, 작가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관중이 있는 것입니다. 화가의 경우에는 이 관중은 두 종류의 아이들입니다. 첫째는 화가가 이전에 그랬던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끊임없이 화가 주위에 있어 화가를 자극하고, 다른 아이들을 이해하는 걸 도와 줍니다. 두번째 아이는 화가의 어깨 너머서 엿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입니다.


화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여러 가지 일과 감동과 태도를 생각해 냅니다. 또 인간과 동물과 경치와, 화가의 세계의 일부인 책에 관하여 지니고 있던 아잇적 사고방식을 생각해 냅니다.
어깨 너머로 엿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에게서는, 화가와 놀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아이들이 보인, 신선하고 깜짝 놀랄 만한 공상을 보는 방법을 얻습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과의 주고받음에서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상상력을 더 자유로이 끌어내는 걸 배웁니다.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거의 모든 어른이 아이들에 대해 품고 있는 소원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소원은 아이들이 세계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도덕을 이끌어내고 전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림책은 그 뜻을 이루는 데 아주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그러한 감정은 주의깊게 책 속에 감추어져 있어도 대개는 책에 있는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은 다만 즐겁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또 다른 기쁨을 찾기 때문입니다. 나 개인으로도 아이들이 내가 만든 책을 읽고 있을 때에는―오늘날 많은 아이들 집에는 장난감인 트럭, 자동차, 트랙터, 불도저 또는 아무 가치도 없는 사실만 실려 있는 책으로 가득 차 있는데―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입니다.


크기가 커지고 새로운 제판 기술로 풍부한 색을 쓸 수 있게 된 현대의 그림책은 화가에겐, 붓과 펜으로 노는 매력 있는 장소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출판된 훌륭한 책을 보면 더 많은 재능 있는 화가가 이 즐거움에 열심히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즐거움은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서점에 가보면 누구라도 압니다. 현대의 그림책은 세계에 널리 퍼지고, 그와 함께 이 즐거움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나는 유럽 어디에서도 그림책 서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중략)


이 모든 일이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책을 창작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지위를 얻었던 것일까요? 아이들과 어린이책과 노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한 화가들을 누가 진실하게 대해줄까요? 내 경험으로 보면 진실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화가 자신의 아이들조차 그렇습니다. 나는 작년에 여권을 낼 때 직업란에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터 및 화가’라고 썼습니다. 담당하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한 쪽 눈을 감고 웃음을 띠며 ‘응, 어린이책?’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응, 별볼일 없는 사람이군.’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혹은 유명한 실업가들의 파티에서 어떤 여자친구가 짐짓 점잖은 체하는 얼굴을 한 신사에게 나를 소개할 때 ‘이분은 뒤봐젱입니다. <멍청한 집오리 피튜니아>의 저자입니다.’ 했다면 그 신사는 틀림없이 한 쪽 눈을 감고 웃음 띠며 나를 보겠지요. 세번째 예는 내 손녀의 경우입니다. 손녀가 아홉 살 때 손녀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앤, 너도 할아버지처럼 아이들 이야기를 쓸래?” “예, 그래요.” 하고 손녀는 말했습니다. “나도 아이들 이야기를 쓸래. 하지만 어른이 되면 어른 이야기를 쓸래.”


앤은 멋대로 해도 좋겠지요. 손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고 거기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잖은 얼굴을 한 어른의 경우 멍청한 것은 그들 쪽입니다. 그들의 태도는 내게 아무런 열등감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집오리, 하마, 토끼, 사자라든가 너구리, 곤충, 악어라든가 그 밖의 여러 가지 상상의 동물원에 속해 있고 이것들도 좋다는 뜻을 보일 마음은 없습니다. 이 동물들은 내 충실한 친구들입니다. 내 아내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애정을 많이 느낍니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키운다든가 현실에 관하여 배우는 데 필요한 공상 이야기와 팬터지를 일생 동안 힘껏 만드는 것입니다.


동물원에 사는 대신에 나는 요정과 용과 난쟁이와 거인들 사이에 살 수도 있습니다. 그들도 아이들에겐 똑같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동물원이 좋아서 동물들을 그리는 일이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동물들은 인간이 처음 말을 하게 된 뒤 쭉 인간의 상징으로 또 신과 마법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쓰여 왔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책의 제작에는 진실한 측면도 있습니다. 때로는 특별히 곤란한 일을 요구하는 측면입니다. 어린이책이 지니는 이 측면은 예술의 관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특히 화가가 화가 자신의 기쁨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을 때에는, 보는 방법이 독창적이고, 디자인으로도 색채로도 잘 구성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그는 실험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힙니다. 또 어린이책이 예술의 한 형식으로서 자기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화가들에게 큰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의 두 측면, 즐거움의 측면과 진실한 예술의 측면은 현실에서는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두 가지는 한 권의 책을 가능한 한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 꾸며내는 전체 노력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설명의 편의상 이 두 가지를 나누어서 가능하다면 일러스트레이션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그것을 아름답게 하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의 그림책을 아이들을 즐겁게 하고 아이들에게 상상의 곡식을 주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작가들도 즐겁게 하기 위해 이야기와 그림을 실은 도구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림책은 또한 화가들에게는 색과 디자인을 써서 실험하고 마음 깊숙이 창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특별히 흥미 있는 표현 형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즐거움만 위해서가 아니라 동시에 화가에게 자신의 예술을 시도하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가장 훌륭한 아이들 책은 아이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독특한 질을 잃지 않고 예술 창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화가가 다른 화가에게 새로운 책 일로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일을 설명하고 있는 걸, 제가 듣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이 화가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 속에 가엾게도 아이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해요. 그 사람이 생각하는 문제란, 흰 여백과 색과 모양을 잘 살리기 위하여 여백의 비율을 어떻게 한다든가, 디자인의 창의성이라든가, 여러 가지 색채의 상호 관계라든가 그러한 것들하고만 관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아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어른들이 방해받지 않고 진실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침대로 내쫓아버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이는 거기에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잘 디자인된 화면을 만드는 일은 아주 간결하게, 아주 생생하게, 명확히 힘찬 이야기를 말하는 것, 중요한 것에 중요함을 주는 일, 화면의 신선함과 독창성을 깨는 요소를 없애는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화면을 아이들에게 더 읽기 쉽게 해 주는 일입니다. 잘 디자인된 화면은 아이에게 즐거움을 주고 시각을 길러줍니다. 아름다운 책에서 아이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게 되는 걸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은 예술 세계의 소동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능으로나 의식으로나, 때로는 아주 의식적으로 흐름 속에 있으려고 애씁니다. 성공의 정도는 그 사람의 재능에 따릅니다. 그는 미술의 새로운 발전 속에서 배운 것을 어린이책에서 나타내고 싶어합니다.


회화와 그래픽 아트에 관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엇이 새로운 발전인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회화의 발전과, 또 그것이 어떻게 어린이책 제작에 영향을 주고 있는가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충 말하면,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회화에서 일어난 놀랄 만한 일―사실에서 순수추상에 이르는 진화―이 오늘의 일러스트레이션 예술을 있게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에는 몇 가지 형식이 있습니다만, 일러스트레이션은 오랜 동안 회화와 혼동되어왔습니다. 그리고 회화의 영역에서 추상화에 이르는 진화가 실은 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몇 가지 혼동은 남아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이란, 좁은 뜻으로는 그 목적이 이야기를 회화로 말하는 것으로 책 또는 잡지의 문장을 보완하여 완전한 것으로 하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일러스트레이션은 문장의 도움 없이 이야기를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넓은 의미로는 일러스트레이션은 독립된 서술 형식의 하나입니다. 특히 그림에 의한 문학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는 쓰여진 문자보다도 앞섰다고도 말합니다. 왜냐 하면 선사 시대의 회화와 선묘화(그림, 드로잉)의 대부분이 일러스트레이션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북아프리카의 타시르(알제리) 지역의 그림들은 여러 가지 물건의 모양과 그것을 만든 사람의 종교 양식을 묘사하는 수가 많습니다. 사냥, 전쟁, 춤추는 모습 들입니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종교화인 프레스코화는 문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고, 아직 읽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와 전설을 그림으로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회화는 일러스트레이션일 수도 있습니다. 전쟁의 장면을 묘사한 커다란 회화는 회화의 기법에 따른 일러스트레이션일 뿐 진짜 회화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목적이 틀림없이 문학이고, 전쟁의 이야기를 말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유명한 19세기 프랑스 화가―역사화 화가인 드타이유와 위대한 들라크르와―는 이 좋은 예입니다. 드타이유는 전쟁 장면을 그릴 때 고도로 감상에 흐르고 낭만으로 꾸민 전쟁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세세한 사건 모두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면밀한 사실성으로 자세와 팔과 군복 단추의 마지막 하나까지 그렸습니다. 그러나 들라크르와의경우, 그가 묘사하려고 선택한 전쟁 장면은 회화에서 추상의 문제를 시도하는 제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피상적으로는 비슷하게 낭만의 전쟁 정경을 보는데, 사실은 들라크르와는 회화를 그리고 드타이유는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회화는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리고 일러스트레이션은 회화와 혼동될 수 있는 것입니다.


회화는 화가 독자의 추상적 창조입니다. 제재가 창조의 과정으로 그 모양을 남기거나 없애는 추상이든, 혹은 처음부터 제재가 완전히 없는 추상이든 그 무엇입니다.
회화에서 사실과 추상을 구분하는 유동성은 때로는 한 편의 회화를 한문으로 옮겨놓는 일로 설명되어왔습니다. 한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화면은 아름다운 추상 디자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고 시각을 만족시켜줄 뿐입니다. 그 화면의 추상 디자인을 다만 아름답다고 바라보던 사람이 만일 마법의 힘으로 갑자기 한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화면은 호수에 관한 시, 또는 중국의 이야기, 또는 무슨 문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상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전문 화가뿐입니다.


자, 어디에서 사실 회화가 회화인 것을 그만두고, 일러스트레이션이 된 건가는 명확히 정의할 수 없습니다. 화가들조차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저는 여기에 대해 말하지 않겠습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진짜 회화일까에 대하여 문장으로 자기 의견을 쓴 화가는 없었습니다. 작가들이 쓴 의견만 있었습니다. 작가들은 몇 세기에 걸쳐 회화는 자연의 모방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회화는 그림이고 또는 일러스트레이션이고 혹은 문학이었습니다.
그리스인―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리스의 회화, 모든 그들의 예술, 조각은 자연의 모방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신화의 인물, 혹은 일상 정경의 사실 묘사였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리스 예술가들이 그들 자신의 예술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알 수 없습니다.
로마인들의 회화에서는 놀랄 만큼 리얼리즘의 정도가 높았습니다. 대부분은 벽에 그려진 일러스트레이션입니다. 그들은 일상 생활의 가장 생생한 세부 묘사와 로마 신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비잔틴 예술은 간주곡이었습니다. 거의 추상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이, 리얼리즘과 예술의 문학성을 수백 년에 걸쳐서 끊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13세기 끝 무렵, 유명한 화가 지오토가 회화에 리얼리즘과 문학성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진짜 회화로서 그의 작품의 가치는 어떻든, 리얼리즘이 그가 성공한 이유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회화를 보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인물과 교회의 정경이 이만큼 생생하게 관중의 눈에 잘 비쳤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리얼리즘과 일러스트레이션의 재능은 당시의 그리고 후대의 작가들에게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지오토가 회화를 비잔틴 예술의 관습에서 해방시킨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15세기에 원근법의 발견으로 회화는 대부분의 사람, 또는 상당수 화가들조차 더욱 일러스트레이션의 정도를 높였습니다. 이들 회화를 주문한 귀족들의 대부분은 회화 속에 종교, 신화 역사 문학의 일러스트레이션의 걸작과 귀족들 개인개인의 업적에 관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본 것이지요.
이 문제는 수 세기 동안 계속되어 그 사이에 쓰여진 미술 평론에서도 충분히 그 사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회화는 그 문학의 가치에 따라 평가되는 시기가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18세기 비평가의 말이 그 좋은 보기가 되겠지요. 그것은 프랑스 화가 그뢰즈(1725-1805)의 <사악한 아버지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인 회화에 관하여 쓴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버려진 사악한 아버지의 죽음은 보는 이의 마음을 쥐어뜯게 했습니다. 그것은 머리가 거꾸로 설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려진 것 모두가 죽은 자의 탄식, 죽은 자가 놓여진 정황의 혼란과 공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주는 강하고 깊은, 그리고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인상이 볼 것을 많이 무정하게 잡아떼었습니다. 여기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함께 숭고함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화가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회화를 한 편의 문학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평가가 그것을 문장으로 옮겨놓지 않았던 일은 용서되겠지요.


그러나 어느 시대의 훌륭한 화가도 제재의 사실 묘사가 그의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거의 틀림없습니다. 오늘 말하려고 하는 의미의 추상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화가들이 회화의 문제에 관해 발언하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서입니다. 들라크르와가 회화에 관하여 문장을 쓴 최초의 화가 같습니다. 그는 위대한 화가일 뿐 아니라 회화에 관해서 훌륭한 문장을 썼습니다. 예술을 직업으로 하는 데에는 그의 일기와 편지는 특히 참조가 됩니다. 우리가 아는 한 회화에 관한 일반 사람들의 오해를 우려했던 것은 들라크르와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는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야기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회화는 감각에 이르는 것만을 의도하고 있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회화 속에 있는 가치는 느낄 뿐이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제재의 필요성에 관하여 의문을 던졌던 것도 또 그가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재를 없앤다는 것이 물론 오해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들라크르와는 그 제재가 희생이 되어 끝난 것을 비꼬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회화를 위해 고른 제재가 너무나 낭만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우리 세기에서는 지금까지 인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은 낭만적인 치장 속에 있는 그 회화의 참 예술성을 지금까지 인정하고 있습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에 더 많은 화가들이 회화는 창조이고 추상이고, 자연의 모방은 아니고 문학도 아니라는 의견을 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20세기의 회화, 순수히 사실 묘사가 아닌 예술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회화는 내게 매력이 없어졌습니다. 관객은 회화를 그림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생각하게끔 습관이 들어버렸기 때문에 무엇을 그렸던가가 분명하지 않은 회화를 처음 볼 때에는 혐오감과 분노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관객이 알고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을 찾을 수 없게 되어 사람들은 와서 화가들이 관객을 비웃고 있는 거라고 비난했습니다. 나는 아이들 시대, 한 매의 포스터에 사람들이 분개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석판으로 커다란 말 한 마리를 그린 거였습니다. 말은 특히 변형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녹색이었습니다. 초록 말이다! 초록색 말을 본 적은 없다! 리얼리즘에서 약간 벗어난 것만으로 이 포스터는 반대의 파도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화가들이 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떼어놓는 것에 서서히 효과를 거두고, 회화에서 제재를 떼고, 마지막으로는 없애버리려 계획하고 있는 사이에, 전문 책 일러스트레이션들은 안목이 높아졌습니다.
삽화가 있는 책은 19세기에 인기가 있었습니다. 목판이나 동판, 석판이라는 새로운 인쇄 공정을 쓸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을 지닌 기능이 풍부한 전문 일러스트레이션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의 일러스트레이션은 먹 단색으로 인쇄되었지만 나중에 채색을 한 것도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색인쇄술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러스트레이션들은 일반적으로는 리얼리즘 전통에 따르고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문장에 꼭 들어맞게 일을 했습니다.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이 시대는 바빴던 것입니다. 훌륭하다고 생각한 것은 몇 사람의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들이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 동시대의 문학 작품과 얼마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예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테니얼이 우선 떠오릅니다. 우리는 앨리스를 생각할 때 곧 앨리스에 관한 테니얼의 생각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테니얼의 일러스트레이션 없이 앨리스를 읽으면 무엇인가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세기가 바뀔 때에는 <즐거운 강에로>와 아서 래컴(1867-1939)이 또 하나의 예입니다. 오늘날에는 래컴의 흔적이 있는 화풍은 좋아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이야기와 확실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자신이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 책의 저자와 동시대 사람이 아닌 경우에도, 일러스트레이터의 이름이 책과 밀접히 맺어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도레(1832-83)는 그런 일러스트레이터였습니다.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은 특히 걸출했던 것도 없고, 화면 구성에도 그는 그만큼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터무니없는 열기와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가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 몇 권의 고전에 오래 맺어져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걸작이 있습니다. 페로의 마더 구스 이야기와 라퐁텐 우화입니다. 마더 구스 이야기에서 도레는 이야기의 판타지에 무언가를 덧붙였습니다. 그가 그린 숲은 요정 이야기의 숲이 그러한 것처럼 어둡고 무섭고 신비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린 성의 낭만적인 분위기는 오랜 동안 독자들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9세기에 일러스트레이션에 관하여 일어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일급 화가들 몇 사람이 책 일러스트레이션의 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관심은 처음에는 실제로 책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 일급 화가는 거의 없었다는 의미에서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시작된 그들의 관심은 성장을 계속하여 금세기에는 특히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상한 우연이지만 자신의 회화가 문학의 일과 혼동되고 있다는 우려를 맨처음 표명한 일급 화가가, 책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다는 문학의 일에 손을 더럽힌 첫 번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들라크르와였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석판화로 일러스트레이션을 붙였습니다. 물론 그 일러스트레이션은 한 사람의 위대한 화가의 완전히 개인의 창조가 되었습니다. 괴테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정기와 힘에 기뻐하고 몇몇 정경의 파악은 자신의 문장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 책은 위대한 작가와 위대한 화가가 한 권의 책에서 일치한 고전의 예가 되었습니다. 들라크르와는 <햄릿>과 그 밖의 희곡 일러스트레이션도 그렸습니다.


그 밖에도 터너, 마네, 로댕과 같이 많은 화가들이 책 일러스트레이션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화가들의 수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20세기부터입니다. 로트렉, 피카소, 마티스, 드랭, 뒤피, 미로, 르동, 그리, 마이욜, 클레, 샤갈, 칼더조차. 그리고 다른 화가들도. 최근에서 라우센베르그가 단테의 글에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렸습니다. 피카소 자신도 특별히 많은 책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렸습니다. 친구들의 시집, 소설, 그리스 고전, 그리고 뷔퐁의 <박물지>에조차.


회화를 서서히 비형상적 예술의 방향으로 이끈 이들 화가들은 책 일러스트레이션에도 새로운 생각을 도입했습니다. 그들이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 책 작가들에 대해 자기들 것이 뛰어나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자주자주 그들 자신의 예술에 관하여는 대등했습니다. 그들은 그 창조의 재능 때문에 일러스트레이션을 문장에 따르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사실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을 붙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문학 작품의 정신 속에 머무르면서도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렸습니다.
그들이 문학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문학이 자신들의 창조의 공상력을 자극해서 그래픽한 새로운 발상을 하는 토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화가들이 자유로이 문학을 다루어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의견도 지금까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술이 위대함만이 아니라 그들이 취한 자유로운 태도가 책 일러스트레이션을 가치있는 비판에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그 자체의 개념과 그 자체의 표현방법을 갖고 있는 예술입니다. 작가가 다른 예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계획한 경우 이외에는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소설에 결정적으로 세밀한 사실성으로 화가의 개념을 덮어 씌우는 일러스트레이션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영사 스크린처럼 삽입됩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특별히 기분 좋지 않은 방법으로 독자의 꿈을 방해합니다.


그렇지만 훌륭한 화가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자유롭고 생동적인 미묘한 방법으로 문장과 관련짓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러스트레이션은 독자에게 문장을 해석하는 자유를 남깁니다. 그것뿐 아니라 독자는 일러스트레이션에 관해서도 자유로이 해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쁨을 얻고 있습니다.


같은 문학 작품에 붙은 두 사람의 다른 화가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비교하는 것으로 두 개념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도레는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이야기>의 어느 판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고 당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은 공상력과 분방함이 있습니다만, 이야기의 정경과 인물을 그가 가진 독특한 리얼리즘으로 결정적으로 인상 지웠기 때문에 독자에게는 도레가 보는 것처럼 가르강튀아를 보는 이외에 보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반 세기 후에 드랭의 일러스트레이션도 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러스트레이션은 르네상스의 예술과 그 양식, 그리고 라블레의 인물상을 자유로이 제시할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독자에게 자기 기분이 내키는 대로 가르강튀아를 볼 자유를 남긴, 볼 만한 화면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화가들은 회화를 일러스트레이션에서 구해냄과 동시에 일러스트레이션에 회화가 지니는 추상적 특징의 몇 가지를 주었습니다.


순수 추상화 화가들, 특히 회화를 생각하면서 제재라는 것을 완전히 없애고 만 화가들은 결코 책 일러스트레이션에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도 말할 가치가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의 예술과 추상 예술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일러스트레이션과 회화 사이의 혼란의 역사를 아주 간단히 다루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돌아갑니다. 오늘날의 그림책에 관해서입니다.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소수파 예술에 관한 강의에서 일러스트레이션과 회화의 관계 그리고 회화의 추상에 이르는 진보에 관하여 이만큼 시간을 들인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또 어린이 그림책은 그렇게 고귀한 선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도 또 상식에서 벗어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현대의 그림책을 이렇게 있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 묘사를 회화에서 없애는 것에서 화가들은 회화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검토하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그래픽 아트는 화가들이 이룩한 발견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디자인의 중요함을 배우고 같은 화면 안에서 서술의 요소를 얻고 화면 전체에 질서와 시각 요소를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회화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묘사된 제재에서는 아니라는 개념에 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일러스트레이션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 설명의 요소가 아니고 그 밑바닥에 흐르는 그래픽 창의인 것입니다.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조차도 서술의 요소를 다만 서술을 위해서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해서 아름다운 화면을 만드는 재료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시작하여 문자 그대로의 파악과 리얼리즘은 일러스트레이터에겐 새에게 새장과 똑같다는 인식이 나온 것입니다. 새장을 벗어나서 비로소 일러스트레이터는 일러스트레이션을 문장에 관련지어 화면을 구성하고 색을 사용하는 것에 가장 즐거운 자유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둘의 차이에도 추상회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추상회화에서 표면의 처리, 공간 이용, 색의 관계, 자유로이 극적인 모양과 선. 많은 것을 일러스트레이터는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이책 화가는 이 모든 것을 그림책의 특별히 특수한 예술 속에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그림책을 만드는 일이 아이들과 노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둘러싼 세계에 아이들이 반응하는 특별한 방법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제약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반대로 제약은 도전하는 대상이고 발명의 근원인 것입니다.


아이들이 구애받지 않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우리들 어른과 같은 생각으로는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흥미를 끄는 것만을 보지만 아이들은 모든 것을 봅니다. 아이들은 아직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남자의 코트에 어떤 단추가 붙어 있다든가, 몇 개 붙어 있는가는 단추 제조업자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느끼고 가능하다면 수도 셉니다. 아이들은 식당 탁자 위에 이따금 있는 무당벌레에 대해서조차 탁자 주위에 앉아 있는 어른들의 일을 느끼는 것처럼 똑같이 느낍니다. 실제는 가장 많은 것을 느낍니다. 아이의 흥미는 잴 수 없습니다. 몸 주위의 세계에 있는 제일 큰 모양에서 아주 작은 세부까지 다 봅니다. 그리고 아이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보고 또 봅니다.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은 말해 보면 아이의 손을 펴서 공상의 모험에로 이끌어 주면 좋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또 사건과 거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 바꾸어 말하면 이야기를 즐겁게 한다는 의미에서 면밀히 그려진 그의 세계를 즐겁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면 아이들은 추상하는 것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또 색의 조화와 콘트라스트, 구도라든가 디자인 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그림은 때로는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만, 일종의 문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림으로 그들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설명하라고 하면 거의 예외없이 거기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여자가 가게로 먹을 것을 사러 가는 거예요. 이것은 트럭 운전수가 트럭에 타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물고기가 많이 있는 바다에서, 어부 할아버지가 물고기를 잡는 거예요.’ 하는 식으로.


내 아이가 네 살 때, 우리가 경험한 일을 이야기해 보지요. 어느 날 엄마가 아이를 허드슨 강을 타고 나이악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두 사람이 올 때까지 나는 산이 양쪽으로 막아 서서 좁아지는 아름다운 강이 마음에 들자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강에는 배가 있고, 그 배는 연기를 피우고 있고, 배 한가운데 작은 집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 문이 열려 있고 남자가 나와서 강을 들여다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인상에 남았던 것은 사건, 특히 조그만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에게는 그들이 바라는 만큼 많은 이야기를 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질은 사건의 유머러스한 측면을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에겐 착상의 풍부한 원천이 됩니다. 만드는 사람은 책을 만들면서 아이들과 함께 웃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웃으면서 제일 진지한 중요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책을 만드는 것에 제약이 있다고 화가도 작가도 문구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제약은 무엇인가 하면, 아름다운 낙원을 향하여 창과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는 감옥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제약이 있다면 그것은 만드는 사람의 재능 정도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술에서는 지금부터 예술가가 창조의 자유를 더 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상회화조차도 어떤 정황에서는 어린이책 분야에서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화가가 이야기의 요소를 살려서 거칠고 자유롭고 거의 추상이라고 할 수 있는 형식으로 화면 디자인과 색채를 얻고자 한다면 화가는 그 화면을 거칠고 거의 추상의 정황 그대로 두고 싶은 기분이 들겠지요. 모양, 나누어질 수 없는 혹은 세부 그림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밝은 색의 표면,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그대로의 흰 화면은 신선함과 힘과 재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세부와 정밀함이 들어오게 되면 이들 요소를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거기에서 화가는 필요한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더 단순한 더 순진한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화가가 직접 글을 쓸 때에는 문장과 일러스트레이션을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에 따라 문장과 그림이 서로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화가는 우선 처음에 일러스트레이션을 기분 내키는 대로 그리고, 그 그림에서 문장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문장이 옷을 꿰매는 사람이 재료인 천을 꿰매 맞추는 데에 쓰는 실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추상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의 관계를 말하려면 내 친구이고 유명한 추상화가와 내가 체험한 매우 흥미 있는 일을 생각해내야 합니다. 그 화가는 자기 아이를 위해 창작한 즐거운 이야기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러스트레이션의 경험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곳에 며칠 머물러 이 문제에 몰두했습니다. 선을 그리는 재능이 있는데도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다는 일이 그에게는 미지의 나라의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연필을 들고 종이를 향하여 여러 가지 정경을 상상하려고 하면 그는 문장으로 이야기된 이야기를 볼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자신의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는 그대로 연속하는 정경을 시각으로 보고, 그것들을 그림으로(일러스트레이션으로) 번역하는 일은 그에게는 불가능했습니다. 며칠 걸려 잘 그려진 작은 추상화인 산을 그렸지만 어느 하나도 이야기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에 다시 생각해 보면 중요한 곳을 놓치지 않고 몇 군데 펜으로 더 그려 넣었다면 이들 추상화를 이야기를 말하는 쪽으로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상반하는 두 개의 회화의 생각을 일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 줍니다. 이것은 또 그림에서도 다른 어느 예술 양식과 똑같이 모든 것을 시도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알맹이 한 시간’이 이제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만, 또 한 시간도 장황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것으로 어린이책을 만든다는 일이, 만들어진 책이 아이들에겐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화가에겐 커다란 만족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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