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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zyleebooks   home Wednesday, 06-11-15 ( 8291h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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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동물원>에 대한 서평 세 편 [Ko]


지난 2004년 비룡소에서 <동물원>이 출간되고 나서 웹에서 찾은 세 편의 서평을 옮겨 싣습니다.

■  "동물원 우리 안에 동물이 없다?" /서정숙 (출처:사이버 아동 문학관)
■  "낯설고도 낯익은" /여을환 (출처: 동화읽는 어른)
■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과 이수지의 <동물원>을 통해 살펴본 아이와 동물과의 관계/ 탁정은 (출처: 오른발 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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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우리 안에 동물이 없다?

- 서정숙 (이화여대 강사)


‘동물원’이라는 제목은 낯설지 않다. 이미 앤써니 브라운의 <동물원>이 번역되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앤써니 브라운의 <동물원>이나 이수지의 <동물원> 모두 동물원 동물들의 부자유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세부 내용은 좀 다르다. 앤써니 브라운의 <동물원>이 우리 속에 갇혀 자유롭지 못하고 인간의 조롱거리가 되는 동물들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시킨다면, 이수지의 <동물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빠져나와 어린이와 놀이를 즐기는 판타지 세계의 동물을 그려냄으로써 동물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


색으로 ‘쓴’,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의 이야기

이 그림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색의 사용 방식이다. 무채색 톤의 그림에서 유채색 그림으로 바뀌기도 하고, 무채색 톤의 그림에 부분적으로 유채색이 사용되기도 한다. 먼저, 무채색 톤의 그림에서 유채색 그림으로, 다시 유채색 그림에서 무채색 톤의 그림으로 변하는 장면들을 살펴보자. 이런 색깔 톤의 변화는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간의 이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청회색의 좀 무거우면서 어두운 장면들은 현실 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런 현실 세계의 장면에는 동물들이 없다. 고릴라, 곰, 하마, 코끼리, 기린, 물새, 원숭이가 사는 우리가 그림에 차례로 묘사되어 있지만 우리 안에는 동물들이 없다. 앤써니 브라운의 <동물원>에 나왔던 동물들의 표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동물들은 사람들로부터 시달리는 데 지쳐서 숨었든지, 싸늘하게 느껴지는 콘크리트 공간이 자신들이 살기에 부적절하다고 여겨서 도망을 쳤든지, 잠시 병이 나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든지, 아니면 동물이 있기는 한데 더 이상 살아있는 동물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를 잃었기에 상호 소통할 수 있는 동물이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안 그렸든지, 어쨌든 동물원 우리 안에는 동물이 없다.



<그림 1>


반면, 밝은 유채색으로 표현된 장면들은 판타지 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동물들은 여기 다 모여 있다(그림 1).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웅덩이가 있는, 넓으면서 개방된 자연의 공간에서 동물들은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놀고 있다. 주인공 아이는 바로 이 자유로운 공간에 합류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림 2>


이 중 특히 재미있는 장면은 아이가 현실 세계에서 판타지 세계로 이동하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다(그림 2). 양 쪽 펼침면으로 된 장면의 왼 쪽 아래는 현실 세계임을 나타내는 회색이, 오른 쪽 위는 판타지 세계임을 나타내는 노랑색이 칠해져 있다. 여기서 아이는 회색의 공간에서 노랑색의 공간으로 건너가고 있는데, 이 때 아이의 옷 일부는 회색이고, 또 일부는 빨간 색이다. 이것은 아이가 현실 세계에서 판타지 세계로 이동하는 순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동물이 사는 우리는 있으되 상호 교류할 동물은 없는 현실 세계로부터 우리는 없으나 편안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동물’들이 있는 판타지 세계로의 이동 말이다.



<그림 3>


다음으로, 회색의 무채색 톤의 그림에 부분적으로 유채색을 사용하여 현실 세계 속의 판타지 세계를 표현한 장면들을 보자. 앞에서 살펴본 현실 세계에서 판타지 세계로의 이동은 이 그림책의 내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공간적 이동을 유도하는 매개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유채색의 소지자인 공작새이다. 타이틀 화면의 공작새 깃털 하나, 동물원 입구에서 아이를 내려다보는 공작새, 동물 우리 앞의 공작새 등, 장면마다 아이의 주변에 등장하는 공작새는 무채색 배경과 쉽게 대비됨으로써 그것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그림 3). 아이는 살아서 움직이는 공작새의 매력에 이끌려 판타지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공작새는 판타지 세계의 전령사인 셈이다.


무채색의 배경에 또 하나의 유채색 대비가 눈에 띄는데, 그것은 아이의 볼이다. 무채색의 다른 그림들 속에 아이의 볼만 발갛게 칠해져 있는데(이 지면에서는 잘 안 보이겠지만 그림 3의 아이의 볼을 보라), 이 작은 볼의 빨간색은 새로운 환경에 호기심으로 상기된 아이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아이 볼의 빨간색은 판타지 세계에 대한 열린 마음이기도 하다. 판타지 세계에 마음을 내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아이의 빨간 볼로 표현된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책의 주인공 여자 아이만이 무채색 공간의 현실로부터 유채색의 공작새가 이끄는 생동감 넘치고 발랄한 판타지 세계로 진입한 것이리라.



<그림 4>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를 색으로 구분하는 방식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영경의 <아씨방 일곱동무>도 아씨의 현실 세계와 꿈의 세계를 유채색과 무채색으로 구분한 바 있다. 그러나 <동물원>에서 색에 의해 구분된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는 영원히 각각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로 통합되어 판타지 세계 속에서 누린 자유로움이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미칠 잠재력으로 남는 그런 세계이다.

이런 해석은 아이가 동물원에서 나올 때의 장면(그림 4)을 통해 가능하다. 이 장면은 판타지 세계에서 함께 놀았던 동물들이 동물원 입구까지 모두 따라 나와 배웅을 하는 장면인데, 여기에서 아이는 빨간 색 옷을 입고 있다. 동물원에 처음 들어갈 때는 현실의 색인 회색 옷을 입고 입던 아이가 판타지 세계를 거쳐 집으로 돌아갈 때는 판타지 세계에서 입었던 빨간 색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이다.


현실 세계로 돌아왔는데도 판타지 세계에서 입었던 빨간색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 중심의 삭막한 현실 환경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놀이를 하던 동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빨간 볼에 들어있던 아이의 생기발랄한 자유에 대한 정신이 그만큼 커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는 동물원의 동물과 진정한 만남을 갖은 것이다. 동물원 우리 안에는 마음으로 만날 동물이 없었지만 아이의 마음속에는 살아서 움직이는 자유로운 진짜 동물들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글과 그림의 따로따로 다른 세계 이야기

이 그림책이 갖고 있는 두 번째 매력은 글과 그림이 각각 다른 세계, 즉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우선 본 화면에 실린 글을 살펴보자.


오늘 나는 엄마 아빠랑 동물원에 갔어요.
우리는 고릴라 집에도 갔고요,
곰 동산에도 갔어요.
하마 수영장이랑,
코끼리 궁전이랑,
기린 마을에도 갔지요.
우리는 또 물새 장에도 갔고요,
원숭이 나라에도 갔답니다.
동물원은 정말 신나는 곳이에요.
엄마 아빠도 재미있었죠?


글은 이것이 전부다. 전체적으로 열 줄에 불과한 이 글만 읽어 보면 아이가 동물 우리를 차례대로 다니며 그 우리 속 동물들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림을 차례대로 읽어보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아이의 시각으로, 본 화면의 그림 텍스트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읽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동물원 앞에서 새 모양 풍선을 샀어요.
아빠 어깨에 무동을 타고 가다가 예쁜 공작새를 보았어요.
그 공작새는 고릴라 우리 앞에 있는 나를 쳐다보았어요.
나는 공작새를 따라갔어요.
엄마, 아빠는 내가 없어진걸 알았어요.(이 장에는 아이가 그려져 있지 않아서 아이의 시점으로 그림을 읽을 수 없는 장면이다.)
공작새를 따라가 보니 하마랑 원숭이가 물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어요.
엄마, 아빠는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찾아다녔어요.(이 장 역시, 아이가 그려져 있지 않아서 아이의 시점으로 그림을 읽을 수 없는 장면이다.)
난 코끼리와 곰과 함께 웅덩이에서 신나게 놀았어요. 엄마 코끼리는 곰을 향해 코로 물을 뿜어댔고, 아기 코끼리는 누워서 하늘을 향해 물을 뿜었어요. 꼭 분수 같았지요. 난 첨벙첨벙 발을 구르며 물을 튕기며 놀았어요.
엄마랑 아빠는 여기저기 계속 나를 찾아다녔어요.(아이가 그려져 있지 않아서 아이의 시점으로 그림을 읽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이번에는 너른 풀밭으로 가니 거기에는 기린도 있고 고릴라도 있었어요. 나는 기린 목을 미끄럼처럼 타며 놀았어요. 긴 목을 타고 내려오면 고릴라가 아래에서 받아주었지요.
엄마, 아빠는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나를 찾아다녔어요. 엄마는 걱정이 되어 울 것만 같아요.(아이가 그려져 있지 않아서 아이의 시점으로 그림을 읽을 수 없는 장면이다.)
나는 새들과도 놀았어요. 하늘을 훨훨 날면서요.(이 때, 아이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떨어진다.)
우리 아기, 여기 있었구나. 나는 벤치에 누워 행복한 꿈을 꾸며 잠을 자고 있었어요.(아이의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상태이다.)
아빠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가는데, 같이 놀던 동물들이 모두 동물원 입구까지 나와서 배웅을 하네요. 기린, 코끼리, 하마, 새, 곰, 고릴라, 악어, 모두모두 안녕.
나는 동물원이 참 좋아요.(엄마, 아빠는 그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구 쪽을 바라본다.)


글과 그림 텍스트를 각각 읽어본 결과, 글만 읽으면 아이가 현실의 우리 속 동물들을 구경하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낸 것 같지만, 그림만 읽으면 아이는 공작을 따라 판타지 세계 속으로 가서 동물들과 신나게 논 것이다. 글과 그림이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에 각각 기여를 한, 이런 글과 그림의 결합을 대위법이라 하는데, 대위법을 취한 그림책들은 한 번 읽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작에 매력을 느끼고 공작을 따라가서 여러 동물들과 놀이를 하는 아이의 모습을 담은 그림 내용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 어린이들은 책장을 앞으로, 뒤로 반복하여 넘기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횟수를 거듭하여 볼 때마다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늘려나가는 것이 그림책을 보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본 화면에 이어 뒤에 있는 면지에는 다른 그림책들과 마찬가지로 글은 없다. 그러나 그림만으로 다음 내용을 이어가고 있다. 원숭이가 꼬리를 수평으로 빳빳하게 세우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온 힘을 다해 고릴라를 우리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하는데, 고릴라는 아이의 벗겨진 한 쪽 신발을 꼭 쥔 채 안 들어가려고 뻗대고 있다(그림 5). 그리고 책장을 넘겨 뒤표지에 이르면 고릴라가 신발을 들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동물원 우리 안에 있다. 마치 아이와 놀던 추억에 잠겨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림 5>


그림책 내용으로 활용된 표지의 그림


<그림 6>

이 그림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앞표지와 뒤표지 모두 그림책의 내용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표지는 본 화면 중 한 장면을 꺼내서 활용하거나 전체 내용을 대표할 수 있는 별도의 그림을 그려 넣는다. 그러나 이 그림책의 경우, 앞표지는 그림책의 맨 앞 내용으로, 뒤표지는 그림책의 맨 마지막 내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먼저, 앞표지를 보면 거기에는 회색빛 칙칙한 동물원 우리와, 동물원이라는 간판 겸 제목만이 있을 뿐 정작 동물은 보이지 않는다(그림 6). 이러한 앞표지의 그림은 이렇게 읽힐 수 있겠다. “회색빛 콘크리트 바닥, 철망 너머 텅 빈 동물원, 왜 동물원에 동물이 없을까요?” 라고. 즉, 동물이 보이지 않는 앞표지의 이 그림은 그림책의 첫 문장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내용의 앞표지는 면지의 내용으로 이어지는데, 면지에는 우리 한 귀퉁이의 뚫어진 철망을 통해 고릴라가 빠져나오고 있고, 코끼리와 원숭이가 고릴라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그림 7). 그래서 앞표지의 우리 안에는 동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림 7>

다음으로, 앞표지와 뒤표지를 이어서 길게 펼쳐놓고 보면 앞표지에 해당되는 오른 쪽 화면에는 동물이 없고 뒤표지에 해당되는 왼 쪽 화면에는 고릴라가 분홍색 작은 신발 한 짝을 들고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는데, 이렇게 한 장면이 된 상태에서 보면, 이것은 내용상 마지막 장면이 된다(그림 8). 고릴라는 동물원에 부모와 함께 왔던 여자 아이와 즐겁게 놀았고, 그 후 그 아이는 집으로 돌아갔고, 이제 아이의 벗겨진 신발을 가지고 혼자 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앞표지와 뒤표지가 그림책 내용의 첫 부분과 뒷부분이 되도록 표현한 것이 이 그림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림 8>

출처: 사이버 아동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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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도 낯익은
《동물원》(이수지 글•그림, 비룡소, 2004년)

-  여 을 환

1.
아이가 부모와 동물원에 갔는데 우리엔 동물들이 없고, 아이도 어느 순간 부모 곁에서 사라집니다. 아이와 동물들은 공상 속에서 만나 신나게 뛰어놉니다. 마지막에 부모는 의자에 누워 잠든 아이를 찾아 함께 동물원을 나섭니다. 어떤 이야긴지 아시겠지요? 첫 세 장면은 가족이 함께 동물원에 들어가 우리를 둘러보는 장면이고, 넷째 장면에서 아이가 공상 세계로 들어가면서부터 장면은 현실의 동물원과 공상의 동물원을 번갈아 보여 줍니다. 현실 장면에서는 부모가 사라진 아이를 찾느라 헤매는 상황이 보이고, 공상 장면에서는 아이가 확 트인 자연에서 동물과 노는 거예요.

어린이 책은 보통 주인공 어린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니까 자연히 아이의 공상을 중심으로 작품을 읽게 되는데요, 왠지 시원스레 읽히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나이 어린 아이입니다. 어린 아이한테는 현실이나 공상이나 별다르지 않아요. 고양이가 되어 달리거나 그림 속 사과의 냄새를 맡는 일은 밥을 먹고 공을 차는 일만큼 확실하고 ‘진짜’입니다. 그림 속 사과가 냄새도 맛도 없다는 사실은, 그걸 먹고 냄새 맡는 행동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아이가 동물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것은, 아이가 길을 잃은 현실을 체험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럴 때에만 진실합니다. 그런데 작가는 주인공 아이가 동물원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낯선 곳에서 부모와 떨어져 있다는 걸 의식한다면 아이는 겁에 질려 있거나 차라리 악몽에 사로잡히겠지요. 그렇다면 길을 잃은 현실은 아이의 현실일까요, 다른 누구의 현실일까요? 현실 장면들은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헤매는 부모를 보여 줍니다. 부모의 불안과 아이의 즐거움은 둘 다 진실일 수 있지만, 작품에서는 서로 방해합니다. 독자는 아이의 공상을 의심하고 기꺼이 몰입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현실과 공상이 나란히 펼쳐지는 구성에서 둘을 아우르는 일관된 이야기와 통일된 관점을 찾을 수 없다면 잘된 구성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작가의 취지가 무엇인지 잘 들여다본 다음에 내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구성이란 작가의 마음과 주제가 펼쳐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작품을 눈여겨본 것은 무엇보다 글과 그림이 썩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어린 아이가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글과, 글에 호응하는 그림들 말고 다른 이야기가 그림에 있습니다.


2.
‘동물원’은 어린이 책에서 재미있고 신나는 곳을 연상시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이 있는 곳이자 즐거운 나들이 장소가 동물원이니까요. 그런데 표지는 그런 생각과 거리가 멀어요. 우리 철망의 격자무늬가 표면을 가득 채우고 우리 안은 비어 있습니다. 그 위에 동물원이라 적힌 표지판이 놓여 있어요. 여기서는 동물원을 통해서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사물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당연히 있어야 할 주인공이 없어서 독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잠깐 혼란을 느낍니다. ‘동물원’이란 제목과 그림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요. 여기에 있는 것은 무얼까? 모두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원에서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 사람들은 동물을 보고 싶고, 그런 욕망을 안전하게 충족하기 위해 동물들은 인공 구조물 안에 ‘보호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물들이 자연 상태 그대로라 믿고 싶고, <동물의 세계>에서 풀밭을 뛰어다니는 동물과 똑같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동물원이 인공의 시설이고, 풀밭이 아니라 시멘트로 발라진 것임을 의식하고 싶지 않습니다. 작가는 동물원에서 사람들이 의식하려 하지 않는 요소를 보여 줍니다.

아이와 동물원에 갈 때면 나들이 기분에 젖어 잔뜩 기대를 안고 들어갔다가 좌절감과 슬픔을 맛보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언제나 동물원을 좋아했어요. 어른과 아이가 보는 것이 달라서겠지요. 이 표지 그림의 인상은 어른인 내가 동물원에서 씁쓸하게 추억하는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이는 그런 개운찮은 뒷맛에 사로잡힌 적이 없는지 “(동물이)없네.” 하고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책장을 넘깁니다. 물론 그러는 가운데에도 그림의 분위기는 아이에게 어떤 인상으로 쌓일 것입니다.
작품의 주조색은 표지와 같이 회색과 청색의 단색조입니다. 이 색조는 감정의 열기를 밀어내고 조금 소원한 기분으로 그림을 보게 만듭니다. 장면의 구성도 그렇습니다. 표지에서 속표지까지는 본문으로 들어가는 통로인데 거기서 주인공이 강하게 부각되지 않아요. 동물원 입구의 낯익은 풍경을 담은 속표지는 작가의 보여 주기 방식을 암시해 줍니다. 가로로 긴 판형에 동물원 벽과 철문이 가로로 길게 놓이고 그 앞으로 주인공을 포함한 인물들이 독자의 눈에서 모두 같은 거리, 좀 먼 거리에 있어요. 첫 세 장면도 이야기와 연결된 초점이 있지만 독자의 눈길을 그림의 다른 요소들로 확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 첫 장면(그림1)을 열면 화면 왼쪽 아래 공작이 있습니다. 속표지들에서 이어온 초점입니다. 같은 왼쪽 화면에 주인공 가족이 있어요. 일인칭 서술자가 말을 꺼냅니다. “오늘 나는 엄마 아빠랑 동물원에 갔어요.” 독자는 그제야 확실하게 주인공 가족에 초점을 맞추고, 그림책에 익숙한 독자라면 속표지에서 공작을 보고 새 풍선을 산 아이를 기억해 낼 것입니다. 그런데 화면 오른쪽으로 눈길을 옮기면서 오른쪽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양산(웬 양산?) 쓴 아줌마를 뚱하게 스치는 순간, 문득 나한테 카메라를 들이대는 아저씨와 마주칩니다. 나같이 이 속에 뭐가 있나 구경거리를 찾아 어정대는 사람들한테 카메라를 갖다대고 있습니다. 흐익, 뭐야. 이 아저씬 여기 왜 있어? 독자는 글이 이끄는 대로 주인공 아이가 동물원에 가는 이야기에 귀를 열고 있었는데, 잠깐 사이 초점이 흐트러지고 맙니다. 마치 작가가 불쑥 튀어나와 말을 거는 듯도 합니다. 무엇이 보여요? 무얼 보고 있나요? 엉뚱한 인물이 돌연 독자 코앞에 다가오자 눈은 좀더 편안히 볼거리를 찾아 뒤로 물러납니다. 새로 초점을 맞추자 아줌마 아저씨 뒤쪽의 작은 인물들이 차례로 다시 시야에 잡힙니다. 거기 있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황량한 기분이 드는 겨울철, 동물원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림은 그것들을 보라고 하는 듯합니다.

동물원에 갔다 저는 내심 착잡해져 돌아섭니다만, 아이에게는 부러 들뜬 말투로 “우리 오늘 사슴 봤지?” 말합니다. 동물원에 가는 까닭이나 동물원에서 추억하고자 하는 것은 사슴이고 코끼리고 원숭이입니다. 그곳에서 스치며 문득문득 뭔가를 느끼기도 했을 사람들의 인상을 저는 집으로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그것들을 보여 주려 하는 걸까요? 작가는 글에 담긴 어린 아이의 말과, 그로써 더욱 눈에 들어오는 아이의 움직임을, 그림에서 다른 인상들로 누그러뜨리고 있습니다.

책장을 넘깁니다(그림2). “우리는 고릴라 집에도 갔고요.” 공작은 화면 중앙 쪽으로 다가가고 주인공은 공작에게 눈길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은 독자의 눈을 공작과 아이에게 오래 붙잡아 두지 않습니다. 눈은 좌우에 걸쳐 화면을 가득 채우는 듯한 커다란 고릴라 우리에 꽂히고, 마침 인물들도 사방에서 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방안지처럼 빽빽한 무늬로 채워진 우리는 그렇게 보는 이의 눈앞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텅 비어 있으면서. 이곳이 ‘고릴라 집’이라고 어린 아이는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사람들이 고릴라 집이라고 만들어 놓은 무엇입니다. 삼엄하게 시선을 가로막는 격자무늬는 저쪽과 이쪽이 넘나들 수 없다는 경계의 표식처럼 보입니다. 실은 그 물건은 가두어 두기 위한 것입니다. 그림에서 아이의 부모와 유아원 교사와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우리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데 아이들 몇은 이미 눈길을 다른 곳, 아마도 공작이 있는 쪽으로 돌리고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작가는 아이들과 부모의 관심이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실제로 책을 보는 아이는 “(동물이)없다.” 하고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려 합니다. 공간을 채우고 있으니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이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 공작은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아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아이를 공상으로 인도하는데, 독자의 눈은 응당 화면 왼쪽에 놓인 인물들부터 차례로 보아 가게 됩니다. 주인공 아이가 공상으로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인물들은, 그림에서 전면을 차지하고 행동도 더욱 커져서 자기들을 보지 않고는 책장 넘길 생각 말라고 큰소리치는 듯도 합니다. 당연히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공상으로 접어드는 아이의 소리는 줄어듭니다.

이렇게 그림은, 글이 펼치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 중심으로 책을 읽으려는 독자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작가가 보여 주려는 것은 텅 빈 우리와 사람들입니다. 통행분리대 위에 올라 놀던 장난꾸러기 남자애들은 동물원에 들어가서도 치고 박고 우리에 뭔가를 던지기 바쁩니다. 남아도는 시간, 외로움을 달래려 동물원을 찾은 노인은 청년들과 아이들의 활기를 보고 더욱 외로워집니다. 옷도 머리 모양도 똑같이 한(교복 차림일까, 아닐까?) 여학생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습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동물을 보는 게 아니라 엄마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는 데 열중합니다. 연인들은 몸을 부비고 사랑을 속삭이기 위해 동물원에 옵니다. 싸늘한 안경알 너머 독자에게 눈빛을 보여 주지 않는 어린 여자아이는 심통이 났는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 엄마가 아무리 끌어도 동물 쪽으로 눈길 한 번 주려 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동물원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아까의 그 아줌마나,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바쁜 아저씨, 동물원 앞 행상들과 걸인까지. 작가는 이것들을 보여 주기 위해 독자의 눈길을 세심하게 이끌고 있습니다.

그림책 그림은 대개 이야기에 참여하는 인물의 관심과 심리를 반영합니다. 공상 장면의 밝은 분위기는, 아이가 동물과 노는 사건이 갖는 즐거운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아이가 공상으로 들어간 다음, 현실 장면은 아이를 잃은 부모의 상황을 담고 있어요. 책장이 넘어갈수록 주변 인물들은 사라지고 장면은 비어 있는 우리와 당황한 부모를 더욱 가까이 보여 줍니다. 수직 기둥을 나란히 배열하여 강한 원근감으로 눈길을 화면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는가 하면, 다음 장면에서는 우리의 철망이 클로즈업되어 독자의 눈길을 화면 밖으로 튕겨내는 듯합니다(그림3). 비어 있는 우리의 황량함과 부모의 암담한 심정이 그림의 인상에서 강하게 전달됩니다. 이 장면들은 부모의 관심과 심리를 반영한 것입니다. 부모들은 더 이상 한가로이 둘레 인물들을 넘겨다볼 수 없고 그들에게 동물원은 흉물스럽고 불안한 곳으로 돌변했습니다. 표지에서 낯익은 동물원의 인상을 보여 주지 않은 것은, 작가가 동물원에 대한 이런 체험을 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구성은 어른이 보는 동물원과 아이가 보는 동물원의 다름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동물원》은 어른의 시점과 어린이의 시점을 뚜렷이 구별하여 보여 줍니다. 존 버닝햄의 《셜리야, 물가에 가지 마!》(이상희 옮김, 비룡소)도 그와 같이 분리된 시점을 담고 있으며 현실의 부모와 공상 속 아이를 번갈아 보여 줍니다. 셜리네는 바닷가에 놀러갔는데 부모와 셜리의 관심이 아주 달라요. 부모는 바닷가가 새롭지 않은 듯합니다. 접이 의자에 앉아 평소대로 뜨개질을 하고 신문을 봅니다. 그런데 셜리 앞에 펼쳐진 바다는 낯선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자고 손짓한 듯하니까요. 이 작품에서 글은 뜻밖에 셜리 부모의 말만을 담습니다. 부모는 친구들과 놀라는 둥, 새로 산 구두를 더럽히지 말라는 둥, 조금 있다 같이 놀아 주겠다는 둥 끊임없이 아이에게 신경 쓰는 양 말을 건네지만, 앉은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 셜리는 조각배를 타고 해적선에 가서 해적들과 싸우고 보물 상자를 캐냅니다. 부모와 아이는 서로의 세계에 조금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바닷가 나들이에서 부모의 관심과 태도가 셜리의 관심과 태도와 얼마나 다른지 드러낸다는 점에서 《동물원》과 닮았어요. 그런데 《셜리야, 물가에 가지 마!》는 통일된 관점과 일관된 이야기로 완성된 데 견주어 《동물원》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셜리야, 물가에 가지 마!》에서 분리된 시점은 부모가 보는 셜리의 모습과 셜리 자신의 체험이 어떻게 어긋나는가를 보여 줍니다. 부모 눈에는 부주의하게 물을 튕기고, 모르는 개를 가까이하고, 엄마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셜리, 무엇보다 바닷가까지 나와서 별 하는 일 없이 시간을 죽이는 아이가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것이 부모의 말에 담겨 있습니다. 해적이 셜리 등에 칼을 들이댈 때 개가 해적의 다리를 무는 그림을 보는데, “그런 개는 쓰다듬지 마. 어디서 놀다 왔는지도 모르잖니.” 하는 부모의 말이 들려옵니다(그림4).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지요. 이렇게 글이 부모의 말을 담고 있지만, 그 말을 듣는 맥락은 셜리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하는 말이 아이 귀에 어떻게 들리는가 실감하게 됩니다.

이 작품이, 어른에게는 아이 말에 귀 기울이고 가족의 단절을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담고, 어린이에게는 아이가 진실하게 겪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설명을 본 적이 있는데, 저는 의아합니다. 작품은 일관되게 주인공 셜리가 보는 세상을 담고 있습니다. 셜리가 보는 세상에서 부모는 진실을 모른 채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자기가 하는 말뜻이 무언지 알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공부를 하고 있어도 공부하지 않는다고 하고 놀고 있는데도 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나날이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어른들한테는 진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셜리 부모한테서 자기 모습을 본 어른들은 깜짝 놀라 자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호들갑을 떨고, 가족의 단절이니 하는 엄청난 말을 하는 게 아닐까요? 물론 그래도 좋습니다. 아이 말에 귀 기울이자는 건 좋은 말이니까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셜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어른은 아이의 세계에 완전히 끼어들기 어렵습니다. 아이에게 낱낱이 보여 달라고, 끼여 달라고 졸라서도 안 됩니다. 다만 아이에게 나와 다른 세계가 자라나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것이 내가 보고 아는 세계와 동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아이에게 중요하고 확고한 세계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요?

《셜리야, 물가에 가지 마!》는 주인공 셜리의 시점에서 통일되어 있습니다. 셜리는 부모와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뚜렷이 의식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말과 자신의 공상이 모두 셜리가 체험하는 세상의 일부입니다. 부모와 자신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셜리에게 공상은 자기만의 고유한 체험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셜리는 자신의 공상이 부모가 보지 못하는 곳에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공상이 독립된 개인인 자신의 세계에만 속한 것임을 압니다. 부모에게서 떨어져나온 아이에게 그러한 자각은 새롭게 자기를 만들고 세상을 체험하는 데 밑받침이 됩니다. 그러므로 비슷하게 《지각대장 존》의 주인공은 자신의 진실과 교사의 논리를 철저하게 분리하고 둘 사이의 갈등과 불화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런 갈등과 불화를 지켜보는 것, 자신의 진실을 완고하게 믿는 것은 자라나는 아이의 자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원》의 주인공은 부모와 분리되지 않은 어린 아이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가 보고 믿는 세계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시선과 아이의 시선은 분열된 채 만나지 않습니다. 부모 눈에 아이의 공상이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고 아이 눈에 부모의 현실이 보일 리 없습니다.

《동물원》에 통일된 시점에 없다는 것은 곧 일관된 이야기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림책을 읽는 독자는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지며 인물이 무슨 일을 하는가 궁금해서 그림을 읽으려고 합니다. 그림은 그와 관련한 정보를 보여 줌으로써 독자에게 읽히는 것입니다. 어느 아이가 이 작품을 읽을 때 “없다.” “여기 있네.” 하고 보았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동물원을 생각하던 방식 그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동물원에서 동물을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며 동물을 찾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 아이는 주인공 부모의 심각한 불안 상태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로선 뜻밖이었는데, 사실 그것은 주인공인 어린 아이가 공상을 즐기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작품이 담는 내용에 아주 선택적으로 아주 부분적으로 반응한 것이지요. 그런 독자에게 작가가 힘들여 구성한 그림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들은 이야기의 진행에 관련이 없는 내용이 너무 많고 초점이 없어 만족스럽지 않아 보입니다.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수록 도리어 낭패감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4.
이야기 전체로 보면 실패했다 하더라도 작가 이수지는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림의 인상과 구성에서 작가의 뜻이 느껴집니다. 주인공 부모가 보는 동물원의 인상은,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 부모가 느끼는 불안을 설명해 주고, 부모의 불안한 심리와 중첩되어 강한 인상을 불러일으킵니다. 풍선이라는 소재를 이야기 전개에 잘 활용한 것도 눈에 띕니다. 속표지에서 주인공이 풍선을 사 쥐는데, 처음 풍선은 아이가 공작을 발견했음을 말해 주는 신호입니다. 곧이어 아이는 진짜 관심사인 공작을 따라가고 대용물인 풍선은 아버지 손에 넘어갑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사라진 다음 당황하여 풍선을 놓치는데, 그 풍선은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담아 아이의 공상 세계로 날아들어갑니다. 아이는 다시 풍선을 쥔 채 현실로 돌아와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림책의 연속 화면에! 담긴 여러 사람들의 사연을 읽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동물원에 가면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자잘한 소음을 즐기며 그 장소의 들뜬 분위기에 같이 흘러갈 때가 있는가 하면, 철망이 격리시키고 있는 ‘저쪽’을 생각하고 동물원의 허술한 환상에 씁쓸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수지의 ‘동물원’은 그토록 허술한 환상 앞을 서로 무관심한 현대의 개인들이 서성이고 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곳에서 아이의 실종은 끔찍한 악몽처럼 느껴지지요. 동물원을 이런 맥락으로 보여 주고, 그것을 아이의 순진한 공상과 대치시켜 불화감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우리 그림책에서 낯선 일입니다. 낯익은 대상을 새롭게 보고 싶은 작가의 의욕이 느껴집니다. 새로운 표현이 새로운 뜻을 실어 나를 때 공감을 얻을 것입니다. 작가가 어린이와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나아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랍니다.

출처: 동화 읽는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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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과 이수지의 <동물원>을 통해 살펴본 아이와 동물과의 관계
- 탁 정 은


1. 들어가면서

  창경궁은 한때 창경원이었다. 코끼리와 사자와 호랑이가 있고, 회전목마와 여러 가지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곳.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 처음 가본 창경원은 그야말로 동화의 나라였다. 난생처음 코끼리, 기린, 구렁이 같은 동물을 봤을 때의 그 놀라움이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본 동물들은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에 나오는 동물들처럼 무표정, 무심했던 것 같다. 저 구석에서 친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은 꿈쩍도 안했고, 흰 곰은 사람들을 보고도 늘어지게 잠만 자고 있어, 어떻게든 깨워보려고 과자를 던지곤 했다. 하지만 꼭 거기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동물들, 그 신기함, 신비함. 동물원은 환상적인 곳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아이들 손을 잡고 다시 찾은 동물원-서울대공원, 어린이대공원에서 만난 동물들은 기억 저편에서 본 동물들과 똑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창경원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 동물원 시계는 세월 속에서 멈춰버린 듯했다. 그림책이나 텔레비전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동물들을 눈앞에서 본 애들은 참 신기해했다. 그러면서 이수지의 《동물원》에 나오는 아이처럼 상상 속에서 이미 동물들과 한바탕 어울려 놀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학년이 높아지면서 동물원에 갈 기회는 점점 많아졌다. 어린이날에, 봄나들이에, 현장학습이다, 사생대회다 해서 일년에 몇 번씩 가게 되면서, 동물원은 특별한 날 놀러가는 곳이 아니었고, 동물원에서 보는 동물에 대해 더 이상 신기해하지 않았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조차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존재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수지의 《동물원》(비룡소)과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논장)을 보면서 동물원을 다시 생각해본다. 두 권 다 아이가 가족과 함께 동물원 나들이를 하는 설정인데, 그 두 권에 담고 있는 동물들에 대한 관점은 좀 차이가 있다. 가슴 설레며 본 코끼리, 사자, 호랑이 등, 이 두 권의 책에는 그런 설렘이나 처음 보는 동물에 대한 신기함은 드러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의 글과 그림. 모처럼의 가족 나들이에서 즐겁게 놀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바램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자세로 똑같이 외롭게, 애처롭게 서있다. 애들이 가까이 가고 싶어도 그 거리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그런 면에서 이 두 권의 책에 담고 있는 동물에 대한 작가의 시각은 어떤 부분은 같고, 어떤 부분은 전혀 다르다. 이 글에서는 두 권의 글과 그림을 살펴보면서 작가의 시각과 동물과 아이와의 관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2. 이수지의 《동물원》

** 줄거리

  나는 엄마, 아빠와 동물원엘 갔다. 동물원 입구에서 공작새 모양의 풍선을 사고, 들어가서 제일 먼저 간 곳이 고릴라 우리. 하지만 우리 안에 고릴라가 없다. 고릴라를 찾느라 여기 저기 살펴보는 엄마, 아빠. 나는 우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공작새를 발견한다. 공작새가 내 주변에서 맴돌자, 나는 공작새를 따라간다. 엄마, 아빠는 내가 없어진 줄 알고 하마 수영장이랑 코끼리 궁전이랑, 기린 마을까지 이리저리 찾아다닌다. 공작새를 따라간 나는 코끼리, 하마, 원숭이, 기린 등의 동물들과 신나게 함께 논다. 새들과 함께 날아다닌다. 그러다 잠이 든 곳이 원숭이 우리 앞 벤치. 신나게 놀다 지쳐 잠든 나를 찾은 엄마, 아빠는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나를 배웅하는 동물들을 보면서 나는 ‘동물원은 정말 신나는 곳이구나’ 하면서 동물원을 나선다.  

** 작품 분석

  전체적으로 회색 톤으로 그린 부분은 현실이고, 연두와 노랑 등 화려한 색채로 그린 부분은 환타지 공간이다. 글에서 담고 있는 내용은 동물원에 놀러간 아이의 일기처럼 단순하고 평이하다. 하지만 그림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글로는 담지 못한 많은 이미지를 담고 있다.

  우선 앞 뒤 표지를 쫙 펴면 그림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바로 고릴라 우리인데, 고릴라가 ‘나’의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다. 고릴라와 고릴라가 손에 든 신발만 빼면 표지는 온통 회색이다. 콘크리이트로 꽉 막힌 듯한 느낌의 회색. 그 안에서 고릴라는 신발 한 짝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고 있다. 이 신발과 고릴라가 환타지 공간과 현실의 연결 고리다.

  표지를 넘기면 면지는 표지 그림과 이어진 우리인데 그 우리를 뚫고 고릴라가 탈출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코끼리와 원숭이, 그들도 우리를 빠져나왔다. 고릴라가 빠져나온 부분은 연두색이다. 여기서 연두는 자연의 공간, 회색과 대비되는 색이다. 다음 장면에 회색 콘크리이트 길이 동물원 길과 쭉 이어지는데 이 길은 ‘내’가 공작을 따라 환타지 공간으로 갈 때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 부분까지가 현실이고 연두로 시작되는 부분이 환타지 공간이다.

  동물원 입구는 어린이 대공원의 정문을 본 따 그렸다. 작가는 동물원 입구를 그리면서 어느 한부분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동물원 입구 전경을 있는 그대로 담음으로써 동물원을 찾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를 데리고 소풍 나온 가족, 연인들, 풍선 장사,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 등 동물원 앞에서 볼 수 풍경을 담아 현실감을 살렸다.

  여기서 ‘내’가 산 풍선은 환타지 공간에서의 놀이를 상징한다. 또한 현실과 환타지 공간을 이어주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공작새, 아빠의 어깨 위에 무등을 탄 나는 그 공작새를 발견한다.  

  이 책에 나오는 동물들의 우리는 모두 텅 비어 있다. 동물들의 우리를 보면 하나 같이 튼튼하게 사슬로 얽고 이중삼중 그물을 쳐,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보여준다. 촘촘히 겹쳐 그린 가는 선의 세로줄과 가로줄로 만든 견고한 우리. 절대로 탈출할 수 없으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이중삼중의 견고한 우리 안에는 고릴라가 놀 수 있는 여러 가지 기구를 그려서 고릴라의 삶이 더 애처롭게 보인다.

  공작새에게 마음을 뺏긴 나는 공작새를 따라간다. 현실에서 환타지 공간으로 이동하는 이 장면을 보면 현실은 회색이고, 환타지 공간은 연두색인데 그 사이를 건너가는 ‘나’의 모습을 보면 옷 색깔이 회색에서 분홍으로 바뀌는 것으로 현실과 환타지 공간의 이동을 담고 있다. 엄마, 아빠는 없어진 나를 찾느라 아무 구경도 못하는데, 나는 동물들과 모여 신나게 논다. 마치 정글을 연상시키는 연두색 공간에서 풍부한 색채로 색을 입은 동물들, 하마와 공작새와 원숭이와 함께 헤엄치고, 동물들의 표정엔 평화로움 그 자체다.

  코끼리와 물장난을 하는 장면을 보면 존 버닝햄의 《야, 우리기차에서 내려》(비룡소)에서 코끼리가 코로 내뿜는 물을 가지고 물장난하는 그림이 떠오를 만큼, 정말 어린애다운 놀이가 펼쳐진다. 놀이에 열중하는 동물들은 매리 홀 엣츠의 《나무 숲 속》(한림출판사)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렇게 동물들과 신나게 노는 장면 사이사이로 잃어버린 ‘나’를 찾아다니는 엄마, 아빠의 모습과 한 장면씩 번갈아 나오는 데 현실은 오로지 회색으로만 담았고, 놀이의 공간은 총천연색이다.   이렇게 놀이에 빠져든 ‘나’는 풍선을 놓쳐버린다. 그 풍선을 황새가 입으로 물면서 놀이는 계속되고, 새들과 함께 날아다니다 벗겨진 분홍색 신발 한 짝, 그것을 받는 고릴라의 손.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나’는 놀다 지쳐 벤치에서 잠들어있다. ‘나’를 찾은 엄마, 아빠는 너무나 기쁘고 반갑다. 여기서 ‘내’ 옷을 보면 공작새를 따라 환타지 공간으로 들어가면서 회색에서 분홍으로 바뀌었는데, 현실로 돌아온 '내'옷은 아직도 분홍색이다. 이 분홍 옷은 동물들과 함께 한 환타지 공간에서의 충만한 기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빠 품에 안겨 동물원을 나서는 ‘나’, 나를 배웅하는 동물들, 지친 어른들의 표정과 달리 동물들도 ‘나’도 웃고 있다. 그들만의 즐거움을 공유하기에 똑같이 알록달록 채색된 모습. 그리고 동물원은 정말 신나는 곳이라는 ‘나’의 말에 되돌아보는 엄마, 아빠의 의아한 표정.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나고, 뒷 면지의 그림에 ‘내’ 분홍 신발을 쥔 고릴라를 우리로 밀어 넣는 원숭이. 그리고 이어지는 뒷표지 그림은 맨 마지막 면지와 연결되면서 또 앞 표지와도 한 장면처럼 이어진다.

** 동물과 아이의 관계

  적어도 주인공인 ‘나’는 즐겁고 행복한 한 때를 동물원에서 보냈다.
  동물원에 가면서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과 이렇게 한바탕 어울려 노는 것이다.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우리를 여기 저기 돌면서 그런 꿈을 꾸는 것이다. 그렇게 어울려 놀 수 있는 동물은 동물원 안에 존재하지 않기에 현실에서의 우리에는 동물들을 그리지 않는 대신, 환상 속에서는 자유로운 존재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아이와 동물들이 하는 놀이다. 물놀이를 하고, 기린 목에 미끄럼을 타고, 새들과 하늘을 함께 나는 아이의 상상 속에 모든 동물은 아이와 수평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아이와 동물들이 친구가 되는 것이다.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단지 구경하는 것만 아닌 친구로서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은 모든 아이가 꿈꾸는 세계다. 하지만 이런 꿈은 동물원을 처음 가본 아이들, 동물원에 있는 동물에 대한 신비함과 신기함을 가진 아이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림으로 봤을 때, ’나‘는 너덧 살 정도된 여자 아이로, 그 아이가 동물원에서 우리에 갇힌 동물들을 그냥 보고만 왔다하더라도 ’나‘의 환상 속에서의 놀이가 남아있기에 ’동물원은 정말 신나는 곳이에요. 엄마 아빠도 재미있었죠?‘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회색과 풀컬러로 그린 부분의 상징적인 의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실에서 동물원은 회색처럼 외롭고 쓸쓸한 곳임을 보여주는데, 환타지 공간에서는 회색을 벗어버리고 풀컬러로 칠해 동심, 즐거움, 행복 같은 것을 담고 있다. 그리고 풀컬러로 그린 ‘나’와 ‘동물들’의 모습에서도 수평적인, 대등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현실과 환타지, 두 공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이 ‘풍선’, 그리고 ‘내’가 남기고 온 ‘분홍 신발‘ 이다. ’풍선‘은 아이들의 놀이, 파티 같은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기에 ’나‘는 동물들과 어울려 놀고, 놀이가 끝나고 우리로 돌아간 고릴라가 간직한 신발은 다시 ’내‘가 동물원에 오면 만날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렇듯 ‘나’와 동물들은 수평적인 관계를 갖고 함께 어울려 놀지만, 그렇다고 생태주의적 입장에서 아이가 생명을 중시하거나 그런 입장보다는 오히려 유아기의 물활론적 사고에서  오는 것이다. 유아기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물과 의사소통하면서 살아있다고 여기는 물활론적인 유아기의 특성이 이 그림책에서의 아이와 동물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이끄는 요소다.    


  3.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

** 줄거리

  지난 일요일, 우리 가족은 동물원에 갔다. 나와 동생은 무척 신이 났다. 하지만 차가 막혀서 동물원에 가기도 전에 짜증이 났다. 동물원에 들어갈 때에도 동생의 입장료를 반으로 깎기 위해 아빠는 매표소 아저씨와 실랑이를 벌였다. 그런 아빠의 모습이 창피했다. 동물원에 들어갔는데, 동물원 지도가 없어 무턱대고 돌아다니다, 코끼리 우리엘 갔다.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코끼리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 기린 우리도 갔는데 기린의 모습 역시도 우울해 보인다. 호랑이를 구경하는데, 아빠는 ‘야옹아, 이리 온’ 한다. 어슬렁어슬렁 걷는 호랑이가 불쌍해 보였다. 하마 우리에 갔지만 배가 고픈 해리와 나는 뒤엉켜 싸우다가 아빠한테 꾸중을 들었다. 펭귄 우리에 가도 계속 먹을 것만 생각난다. 드디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선물가게에 가서 우스꽝스러운 원숭이 모자를 하나씩 쓰고 곰 우리에 갔는데 곰은 바보처럼 하릴없이 왔다 갔다 하기만 했다. 서로 싸우는 비비 원숭이들도 보고 고릴라도 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는 오늘 뭐가 제일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점심 식사, 동생은 원숭이 모자, 아빠는 집에 가는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씁쓸하게 말한다.  ‘동물원은 동물을 위한 곳이 아닌 것 같아. 사람들을 위한 곳이지’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 우리에 갇혀있는 꿈을 꾼다.

** 작품 분석

  ① 가족
  표지 그림의 가족 사진은 엄마와 나와 동생을 합쳐도 모자랄 것 같은 거구의 아빠, 원숭이와 비슷한 나와 동생, 그리고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어두운 표정의 엄마는 아빠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아빠와 아이들의 옷이 같은 계열의 색이라면, 엄마는 가족에서 소외된 색이다. 거만해보이는 아빠, 장난꾸러기 아이들, 우울한 엄마, 이 가족이 동물원엘 간다.

  이 가족에서 가장 튀는 사람이 아빠다. 꽉 막힌 도로 때문에 슬슬 지겨워지는 동물원 나들이 장면에서 아빠와 가족간의 관계가 드러난다.
“우리가 만난 지옥이 무슨 지옥인 줄 아니?”
“몰라요”
그러자 아빠가 큰 소리로 외쳤다.
“바로 교통지옥이지.”
다들 ‘와하하’ 웃었다. 나랑 엄마랑 해리만 빼고.  -4쪽-

  이 글에서 보듯 아빠는 매우 위압적인 존재다. 또한 자기중심적 인물이다. 다들 웃었지만 아빠 외에 다른 사람들은 웃지 않고 있는 그 모습에서 가족 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매표소에서 표를 사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다. 아빠가 매표소 아저씨와 입장료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면서 “이런 날강도 같으니라고!” 소리치는 아빠를 보며 아빠 때문에 창피함을 느낀다. 다른 사람은 배려할 줄 모르고, 허세가 가득한 아빠의 모습은 동물들을 구경하는 장면에도 이어진다. 아이들이 뭘 먹고 싶어도 ‘안돼'라고 말하고, 호랑이 우리에 가서도 “야옹아, 이리 온”하고 말하는 아빠.
  반면 아이들을 보면 동물원에 가는 들뜬 모습은 볼 수 없다. 동물원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루해 한다.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고, 배고파 죽겠다고 보채고, 다투는 아이들, 그래서 아빠처럼 아이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동물의 모습이 되어 간다.
《돼지책》(웅진)에 나오는 엄마처럼 이 책에 나오는 엄마도 미미한 존재다. 아빠에 비해 왜소하고  어두운 표정, 동물원 구경을 하는데 아빠와 아이들만 나오고 엄마는 비비원숭이 우리부터 나온다. 고릴라가 나오는 그림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원은 동물들을 위한 곳이 아닌 것 같아. 사람들을 위한 곳이지”
  아마도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엄마의 이 말이 아닐까? 허세가 가득한 아빠나 동물원에 대해 아무런 호기심도 없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아무 생각이 없기에 동물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글과 그림으로 담고 있으되, 갇혀있는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동물들이 살만한 곳이 아님을 그림으로 강조하고 있다.  

  아빠나 아이뿐 아니라 사람들이 나오는 그림은 동물 그림과 대조된다. 동물 그림이 직사각형의 검은 테두리 안에 한 장의 스틸 사진과 같은 느낌이라면 사람들이 나오는 그림은 대충 오려 붙인 그림 같다. 그리고 동물 그림에 비해 덜 정교하고, 그림 중간 중간에 말풍선을 넣에 만화풍으로 가볍게 담았다.
  반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동물 같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는 그림을 보면  표를 파는 판매원의 모습도 그러하거니와 귀 옆으로 작은 뿔이 돋은 사람,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발을 가진 여자, 새부리 같은 코의 남자 등 동물의 모양을 사람 속에 넣어서 동물원에 온 사람들 모두가 다 동물처럼 보인다. 아빠의 주책 같은 행동도 야수의 이미지를 담으려 한 건 아닐까?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이 점차 동물의 모습으로 변하는 아빠와 아이들의 모습이다. 또한 사람들은 우리에 갇힌 듯한 느낌이 나도록 교묘하게 그림을 그려, 동물이나 사람이나 똑같이 갇혀 사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호랑이를 보고 있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면, 호랑이가 있는 곳이 밝고, 아빠가 있는 곳은 어두워서 누가 갇혀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해리와 내가 싸우는 장면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식사를 하고 난 아이들은 원숭이 모자까지 써서 더욱 동물 같은 모습이다.  

   ② 동물
  사람을 풍자적으로 희화화해서 그리고 있다면 이 책에 나오는 동물의 모습은 하나 같이 외롭고 쓸쓸하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우리 안 풍경을 보면 높은 지붕, 콘크리이크로 쌓아올린 회색이나 갈색의 견고한 담장,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검은 철망, 그 안에서 사는 동물들은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는다. 모두들 뒤돌아서서 사람들을 외면한다. 어찌보면 조금이라도 사람들과 멀리 덜어져 있기를 바라기에 그림에서도 그런 거리를 두고 동물을 그렸다.

  이런 동물의 모습은 앤서니 브라운의 장기인 극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려, 실제 동물을 눈 앞에서 보듯 아주 정교하고 세밀하다. 특히 우리 밖을 내다보는 고릴라 그림은 까슬까슬한 털을 느낌까지도 손에 잡힐 듯 하다. 하지만 그 고릴라의 표정은 우울하다. 외롭고 쓸쓸하다. 크로즈 업해서 크게 그린 고릴라의 우울한 눈동자를 보면서, 뒷모습을 주로 그린 다른 동물들 역시도 이런 외롭고 쓸쓸한 표정일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기린 우리에 서있는 기린의 모습처럼 배경 색과 동물의 몸 빛깔을 동색계열로 서서 마치 동물이 안에 없는 듯한 착시현상도 느낄 수 있다. 몇 년 만에 간 동물원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옛날 동물 그대로를 보는 듯한, 어찌 보면 풍경화 속의 하나의 사물 같은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호랑이를 그린 그림에서 다른 우리보다 더 견고하게 그물망이 처 있다. 세상에 무심한 호랑이의 모습이 외롭게 보이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호랑이와 겹쳐서 희미하게 또 하나의 서성이는 호랑이 실루엣이 보인다. 이 실루엣을 통해 계속 같은 자리를 서성거리는 갇혀 잇는 호랑이의 모습을 담아놓으려 했다.  

  코뿔소 우리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나갈 수 없음을 암시하는 거대한 콘크리이트 벽, 그 안에 초라한 코뿔소, 벽면에 기묘하게 숨겨놓은 희미한 코뿔소 모습. 그것과 대비해 아빠가 눈물 흘리며 웃고 있는 그림이 괴기스럽다. 귀에서 돋아난 털, 시커먼 입안 코털 등 인간의 탐욕스런 모습과 동물원 안에 무심한 표정이 대비된다.

  동물들 그림 중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오랑우탄의 모습이다. 마치 격투기를 관람하러 온 사람들처럼 구경하는 사람들의 공격적인 분위기,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오랑우탄 그림이다. 마치 긴 머리채 여자의 웅크리고 돌아앉은 모습을 보는 듯한 섬뜩함. 사람들이 던진 듯한 과자, 과일껍데기가 더욱 쓸쓸하게 하고 ‘이렇게 만든 것이 너희 인간들이야’ 하고 말하고 있다.

  ③ 동물과 아이의 관계
  가족 간의 의사소통의 부재를 주로 다루는 앤서니 브라운은 이 책에서도 가족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아빠와 아이들, 아빠와 엄마의 관계는 동물과 사람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동물들을 구경하려는 사람들과 우리에 갇힌 동물들의 쓸쓸한 모습은 더 이상 신기하거나 신비하지 않은, 단지 구경거리일 뿐이다. 이 동물들과 같은 위치에 놓여진 존재, 가족과 가장 동떨어진 존재가 바로 엄마다.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은 그저 쓸쓸하고 외롭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우리는 차갑고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동물이나 사람이 모두 같은 모습으로 닮고 있다는 점이다.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을 보면서 사람들도 어느새 동물이 되어간다.  그림을 통해 작가는 사람과 동물을 다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보고 있다. 생명을 가졌기에 인간이 동물보다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 다 같은 생명이기에 동물들의 생명도 사람과 똑같다는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허세와 권위가 가득한 아빠나 동물들에는 관심이 없는 아이들을 통해 사람이 동물만도 못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풍자한다.  

  사람에 대한 통렬한 풍자는 사람의 입장에서 동물은 단지 구경거리가 될 뿐인데,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도 똑같은 구경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담고 있다. 점차 동물처럼 변해가는 사람들, 울타리나 그림의 윤곽을 교묘하게 그려서 우리를 연상시킴으로써 동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도 갇혀 사는 동물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간 아이가 꿈에 우리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쭈그려 앉은 모습이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검은 실루엣으로 담은 밤 풍경은 더욱 쓸쓸하다. 동물원의 밤인 듯싶은데, 텅 빈 우리와 시커먼 건물들은 이 차가운 느낌을 더 하고, 나무마저도 우리 속에 가둬놓아서 마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이 저렇게 닫힌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두 권의 책에 나타난 아이와 동물의 관계

  동물원이라는 공간은 어린이 책의 공간적 배경으로 참 매력적인 공간임에 틀림없다.
신비하고 신기한 동화 같은 곳, 그래서 설레게 하는 곳, 하지만 이 두 권의 책 속에 나온 동물원은 그런 신비함보다는 갇혀있는 동물들의 쓸쓸함이 가득한 곳. 그럼에도 이수지의 《동물원》에서 ‘나’는 환상의 공간에서 동물들과 어울려 논다. 아마도 그 간절한 바램이 ‘나’를 놀이의 세계 속으로 끌고 간 것일 게다. 그렇게 함께 노는 모습에서 ‘나’와 동물들이 똑같은 것을 원하는 존재로 비쳐진다.

  반면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에서는 동물원 나들이를 통해 가족 간의 관계를 빗대어 말한다. 또한 가부장적인 가정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런 의미에서 앤서니 브라운은 현대 사회를 커다란 동물원으로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은 창살만 없을 뿐,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권위적인 아빠나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통해 동물이나 사람이나 다 똑같은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가족이라는 틀에, 사회라는 틀에 갇혀 꼼짝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과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쓸쓸하다. 그 쓸쓸함은 마지막 장면의 우리에 갇힌 아이와 밤 풍경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수지의 《동물원》이 ‘다음에 다시 만날 거야’ 라고 암시를 하고 있어 따뜻하게 끝난다면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은 다시 가고 싶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그 동물처럼 갇혀 있는 ‘나’의 모습을 꿈에서 보면서 무얼 느낄까? 그리고 동물원을 다녀온 아이는 다시 동물원에 가고 싶단 생각을 할까?

  두 작품 다 어느 시점에서는 동물과 사람을 대등한 관계로 보고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이수지의 《동물원》에서는 아이와 동물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모습에서 동물 속에 아이의 심성을 불어 넣었다. ‘현실- 환타지 공간의 모험- 현실’로 짜여진 이야기에서 환타지 공간의 모험은 동물들과 아이가 친구가 되어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 수평의 관계는 생태주의적인 측면보다는 유아기의 ‘물활론적 사고’에서 오는 것이기에, 동물들과 함께 놀고 싶은 아이의 간절한 바램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앤서니 브라운은 동물과 사람은 모두가 생명을 지닌 존재이기에 평등하다는 것으로 동물원을 바라본다. 갇혀있는 동물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은 사실 동물만도 못한 존재임을 일깨우는 글과 그림들. 오히려 동물들의 존엄성을 인간보다 더 강조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은 생태주의적 관점이 바탕에 깔려 있다.

현대의 동물원은 더 이상 꿈과 희망이 가득한 곳이 아니라고 두 책은 말한다. 회색으로 뒤덮인 이수지의 동물원이 그렇고, 앤서니 브라운은 외롭고 쓸쓸한 동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어떤 면으로는 그저 구경거리였던 옛날의 동물에 비하면 그나마 생명의 존엄성을 책을 통해 생각하게 한다는 면도 간과할 수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수지의 동물원에서처럼 아이들이 동물들과 어울려 한바탕 노는 꿈이라도 꾸었으면 좋겠다.  


출처: 오른발 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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